파종회복야공파(僕射公派)
복야공파(僕射公派)

수홍(守洪):복야공(僕射公)


복야공(僕射公) 수홍(守洪)의 단소. 경북 안동시 서후면 교리 송파(松坡)에 있다. 

상서공(尙書公) 중시(仲時)의 둘째아들로 태사공후 10세대파의 네 번째인 복야공파(僕射公派)의 파조(派祖)이다. 배위(配位)와 생몰연월 및 묘소의 소재 등을 모른다. 처음에 공은 관향(貫鄕) 안동에서 출생하여 장성해서도 상당 기간 거주하며 향직을 받아 부호장(副戶長)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안동 권씨 최초의 족보인 ≪성화보(成化譜)≫에 공의 관직이 부호장으로서 증 군기감(贈軍器監)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군기감은 군기감의 감(監)으로서 정4품의 대부직(大夫職)이다. 그러나 현금의 모든 권씨 보서에는 공의 관직이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상장군(上將軍)으로 되어 있다. 대개 추밀원 부사는 정3품직이고 상서좌복야는 정2품에 해당하는 공경직(公卿職)이다. 보서에 공이 이 직함이 증직(贈職)인지 행직(行職)인지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자손이 크게 귀현(貴顯)함에 따라 관작이 추증되고 거듭 가증(加贈)된 것으로 봄이 타당할 것으로 인식된다. 추밀원 부사로서 그 상위직인 상서좌복야를 겸할 수가 없으니 추밀원 부사와 상서좌복야를 각기 더하여 추증받은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공이 처음에 관향 안동에서 입신(立身)하여 있다가 백씨(伯氏) 추밀공(樞密公) 수평(守平)이 경사에 진출한 연고로 뒤이어 서울로 이거하여 문호(門戶)를 이룬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공 또한 기득(旣得)의 기반이 만무할 경사에서 백씨와 함께 군직(軍職) 등에 들어가 종사(從仕)하며 간고한 가운데 근면으로 집안을 중흥시켰을 것으로 본다.

공이 1남3녀를 두었는데 아들 자여(子輿)는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서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에 이르고 병부상서(兵部尙書)를 겸하였다. 이 또한 실직(實職)이 아닌 증직(贈職)이라 하더라도 매우 현달하지 않고는 받을 수 없는 작위이다. 손자는 5인인데 장손 책( :允宜)은 첨의평리 치사(僉議評理致仕)이고 다음 윤평(允平)은 증 추밀부사 좌복야이며 다음 윤보(允保)는 중문지후(中門祗侯), 다음 조여(祖如)는 삼중대광(三重大匡), 다음 빈( )은 중문지후이다. 그리고 장증손(長曾孫) 일재(一齋) 한공(漢功)에 이르면 추성동덕협찬공신(推誠同德協贊功臣) 삼한벽상삼중대광(三韓壁上三重大匡) 도첨의 우정승(都僉議右政丞) 예천부원군(醴泉府院君)으로서 문탄공(文坦公)의 시호를 받기에 이른다. 일문의 영화와 현달이 불과 3,4세에 그 백씨 추밀공 일가와 함께 고려의 중앙 경조(京兆)에서 으뜸의 현벌(顯閥)을 이루었다. 한편 공의 장증손 한공(漢功)이 예천(醴泉)을 관명(貫名)으로 군호(君號)를 받고 다시 그 후손이 잇따라 예천군(醴泉君) 또는 예천백(醴泉伯) 등을 받게 된 것은 어떤 연유인가. 이는 공의 백씨 추밀공 자손에게 먼저 영가(永嘉)·길창(吉昌) 등으로 봉군(封君)했기 때문에 중복을 피해 안동의 인접 고을인 예천을 관명으로 택했을 수도 있다. 또한 공이 처음 경사로 진출하기 전에 행직 부호장으로 입신했던 곳이 예천땅이어서 거기에 전장(田庄)을 남겨 세습(世襲)케 하니 자손이 이를 구기(舊基)를 삼아 왕래하며 별업(別業)처럼 전수한 것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이 가설(假說)로 한다면 여기에서 중요한 단서를 잡을 수가 있다.

추밀·복야 양공의 후손은 이후로 안동 권씨의 양대 산맥(兩大山脈)을 이룬다 할만큼 많은 숫자로 번성하는데 추밀공파 후손은 주로 기호(畿湖) 지방에, 복야공파는 주로 영남(嶺南)에 세거하게 된 것이 우연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추밀공은 상경할 때 안동 지역에 어떤 세업(世業)을 남겨두지 않고 올라와 장단(長湍)에 새로이 근거를 잡아 이를 자손에게 구기로 남겨 주었다. 그리하여 추밀공 이하의 역대 묘소가 모두 장단 일대에 있게 되었다. 이에 반해 복야공은 예천땅에 장만했던 근거는 그대로 유지시켜 두고 경사로 이거하였고 그리하여 사후에는 예천으로 환장(還葬)되었으며 그 자손도 살아서는 서울에서 현달하되 죽어서는 예천땅으로 돌아가는 것을 환향으로 삼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이러한 환향 의식은 그 후손의 세거 형태에 반드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본다. 또 한 가지 이를 뒷받침하는 징후는 공에게 세 딸이 있는데 모두 지방 토성인(土姓人)에게 출가했다는 점이다. 3녀중 장녀는 호장(戶長) 방걸(方乞)에게 출가하였다. 방걸은 온양인(溫陽人)인데 이는 온양 방씨의 뜻이지 그 거주지가 반드시 온양인 것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호장이니 경직(京職)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아들 방만년(方萬年)은 서울로 올라와 과거에 급제(及第)하여 경직에 진출한다. 여기에서 방만년은 외가의 반연으로 경사에 진출해 입신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함이 없지 않을 것이다. 차녀는 별장 부정(別將副正) 권양준(權良俊)에게 출가한다. 권양준은 동성(同姓)으로서 좌윤공(佐尹公) 지정(至正)의 손자이니 공의 재종손(再從孫)이 된다. 즉 좌윤공과 공이 4촌간인 것이다. 골품(骨品)을 중시하던 신라에서 왕족이 혈통을 지키고자 지친혼(至親婚)을 했고 고려 왕실도 그와 같이 했거니와 안동 권씨는 신라 왕통의 긍지를 지켜 상당 기간 동성혼을 오히려 선호하였다. 그 결과로 공이 재종손을 사위로 삼은 것인데 양준은 별장과 부정에 그쳤으니 향직에 머문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공의 외손자가 되는 양준의 아들 수(粹:精)는 중앙에 진출해 문과(文科)를 하고 이로부터 그 문호를 크게 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이 양준의 후예인 좌윤공파 일가는 잇따라 현달하면서도 그 근거를 안동에서 옮기지 않아 세장지(世葬地)가 안동의 제비원[燕院]에 있다. 다음 3녀는 김이견(金利堅)에게 출가하는데 이 역시 호장(戶長)이고 그 딸이 권미(權美)에게 출가하나 또한 호장의 향직이다. 이와 같은 여러 정황으로 보아 추밀공이 남긴 구기가 경기도 장단이라면 복야공이 남긴 구기는 경북의 예천땅이 아닌가 상정해 보는 것이다.

공을 제향하기 위해 후손이 단소(壇所)를 봉축한 곳 또한 경북 안동의 서후면 교리(西後面校里)의 송야(松夜:솟밤)이다. 이곳이 공의 5대손 예의 판서(禮儀判書) 인(靷)의 묘산(墓山)인 것이 인연이겠으나 예천 땅에서도 가까운 거리이다. 1994년 갑술 봄에 후손이 이곳 송야산(松夜山)에 임좌병향(壬坐丙向:북을 등지고 남쪽을 향한 자리)으로 단소를 베풀고 산하 동구(洞口)에는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이하 생략)

     

참고문헌:태사공실기 

1,309쪽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