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권씨 인물아시조 낭중공(郎中公)
아시조 낭중공(郎中公)

 아시조 낭중공(郎中公) 단소(壇所)

시조 태사공의 독자(獨子) 낭중공의 단소: 경북 청도군 운문면 정상리 구룡산에 있다. 
(사진 좌측에 있는 석등 위쪽 산등성이에 권릉이 있다.

다른 위치에서 본 단소
청도운문(淸道雲門)의 권릉(權陵).
신도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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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자(子) 인행(仁幸)·낭중공(郎中公) 

시조 태사공의 독자(獨子)이다. 모든 안동 권씨가 이 자손이며 2세조로서 아시조(亞始祖)라고도 부른다. 휘(諱)는 인행(仁幸)이다. 태어나고 돌아간 연대를 알지 못한다. 그 휘자(諱字)에 부친의 행(幸)자를 넣어서 어찌 촉휘(觸諱)하였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그것이 당시의 풍습이었다는 설이다. 고려 후기의 명유(名儒)인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말에 '신라 사람이 조(祖)와 자손 간에 같은 이름자가 있는 것은 당시의 세속이었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에는 부자간에 같은 이름자를 넣어 이름을 지었고 중국 문화의 영향으로 이를 휘피(諱避)하게 된 것은 고려의 초중기 이후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조자손 간에 같은 자로 이름을 지은 예는 대표적인 것이 고려 태조와 그 부조(父祖) 3대의 경우이다. 고려 태조의 본디 성씨를 모르거니와 그 5대조가 되는 국조(國祖)는 호경(虎景)이고 그 증손이 작제건(作帝建)이고 다음이 용건(龍建)이며 다음이 왕건(王建)이다. 용건은 뒤에 왕륭(王隆)으로 성명을 바꾸고 사후에 세조 의덕대왕(世祖懿德大王)으로 추존되지만 이렇게 3대가 건(建)을 돌림자로 써서 이름을 지은 것은 당시의 도참비설(圖讖秘說)에 3건, 즉 이름에 건자가 들어간 세 사람이 삼한(三韓)의 주인이 된다는 말이 돌아 거기에 맞춘 것이라 한다. 그러면 이 시절에 대를 내려 같은 자를 써 이름을 짓는 것은 매우 고귀하거나 특수한 신분의 경우로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공의 관직은 낭중(郎中)이다. 이 관직명으로 공을 낭중공이라 부른다. 낭중은 본디 신라 후기에 집사성(執事省)과 병부(兵部)·창부(倉部)에 딸린 벼슬로서 17관등의 13품직인 사지(舍知)로부터 11품직인 내마(柰麻:내마에도 7등급이 있음)까지가 이 직에 임명되었다. 이것이 남북 왕조 시대의 발해(渤海)로 가서는 정부 각 부(部)의 장관이 되었고 궁예(弓裔)의 태봉(泰封)에서는 광평성(廣評省)과 각 부처의 중하위관이 되었다. 직위는 중하에 속하지만 해당 부서의 실무를 맡고 있는 요직이었다. 고려 태조는 서기 918년에 궁예의 포학을 그치게 하고 개국하였지만 태봉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였다. 그러면서 이 낭중이라는 직함을 중앙의 경직(京職)뿐이 아니라 지방의 향직(鄕職)으로도 부여하였다. 향직은 나중에 고려가 중앙의 왕정 집권화(王政集權化)가 강화·확립되면서 쇠퇴하여 각기 그 지방의 서리(胥吏), 즉 아전(衙前)으로 전락하지만 초기에는 경관과 대등하였거나 아니면 그 고을과 지역에서의 실권이 막강하여 각지역의 분립된 영주(領主)와 같은 존재였다. 그와 같은 지방의 주부군현(州府郡縣)의 장에게 고려 태조가 이 명칭을 부여하였는데 6대 임금 성종(成宗) 2년, 983년에 이를 바꾸어 호정(戶正)으로 하였다. 이 호정은 당시 9등급으로 나눈 향직의 제4위였다.

한편 낭중은 성종조 향직 개편 후에는 병정(兵正)으로 되었다는 설도 있다. 병정은 고려 시대 지방 관아의 한 부서로서 군병의 일을 맡은 사병(司兵)에 딸린 향직 이름이었다. 이 이름으로는 조선 초기에도 각 지방에 향리직을 둔 바가 있다. 또 성종 초에 병부(兵部)의 경(卿)을 병정이라 바꾸기도 하였다. 그리고 지방 관아의 부서로서 병사를 맡아 보던 사병(司兵)에는 당시의 향직인 병정(兵正)·부병정(副兵正)·병사(兵史) 등이 있었다. 요컨대 이와 같은 성격의 낭중에서 공이 정확히 어떤 직임의 낭중을 역임하였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서기 930년에 태사공이 병산대첩(甁山大捷)을 이룰 때에 청장년기에 있었을 것을 상정한다면 공이 낭중의 직함을 받은 것은 고려 개국 13년 이후로부터 성종이 이를 호정으로 고칠 때까지인 서기 983년의 기간을 넘지 않는다. 이것은 공이 향직으로서의 낭중을 받았을 경우이다. 그런데 또한 공이 경직으로서의 낭중을 받았을 가능성도 완전 배제할 수는 없다. 이 가설(假設)은 공이 병산대첩을 전후하여 고려 태조에게 볼모로 견질(見質)되었을 경우를 상정하여 성립된다. 당시는 신약(信約)의 보증으로 약자가 강자에게 볼모를 반드시 보냈으며 대등할 때는 서로 볼모를 교질(交質)하였다. 전자는 신라가 고려에 스스로 볼모를 보낸 것이 대표적인 예이고 후자는 고려와 후백제가 화호의 뜻으로 각기 그 임금의 사위나 조카를 보낸 것이 실례이다. 고려 태조는 복속하거나 귀부해오는 각처의 영주(領主)에게서 반드시 그 자제를 볼모삼아 유학(留學) 등의 명목으로 서울 송도(松都)에 머물러 두었다. 안동은 영남 동북부의 요충(要衝)이자 웅진(雄鎭)이다. 주변 고을이 모두 고려와 백제에 귀부해도 홀로 끝까지 남아 있다가 전략적으로 고려군과 연합하기 위해 일시 귀부하여 국적 견훤군을 물리쳤다. 그러나 그 본의는 종국(宗國) 신라에 있지 고려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안동의 영주 3태사의 자제를 고려 태조가 볼모하였을 것은 필지의 일이었을 것이다.

이럴 경우의 볼모에게는 좋은 예우가 따른다. 그리하여 명민한 자질의 공에게 경직(京職)의 낭중이 배수(拜授)된다. 이 가설이 성립되면 공의 혼사(婚事)에 대한 의문이 풀릴 수가 있다. 공의 배위(配位) 양천 허씨(陽川許氏)는 공암 촌주(孔巖村主) 허선문(許宣文)의 딸이다. 지금의 서울 강서(江西)와 양천구(陽川區)에 해당하는 옛 공암촌은 한강 하류의 한 나루터로서 교통의 요지이자 곡창 지대였다. 여기에 어떤 연유로 정착하여 큰 문호를 이룬 허선문은 가락국(駕洛國) 김수로왕(金首露王)의 후예로 알려졌다. 당시의 혼사는 아직도 엄격한 골품제적 신분을 본위로 하여 이루어졌을 터이려니와 신라 왕실의 후예로서 안동 영주의 아들인 공과 공암의 촌주인 허선문의 딸은 서로 어울리는 혼반(婚班)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와 같은 난세(亂世)의 교통 여건에서 어떻게 영남 안동의 공이 경기의 한강 하류까지 와서 공암 촌주 허선문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을 것인가. 여기에서 공이 송도에 와 볼모살이를 하고 그러면서 경직을 받았다면 정부의 권유나 주선 등으로 이같은 혼사를 이루었을 가설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공이 송도의 경직으로 종생(終生)토록 사환(仕宦)을 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낭중이란 그리 높은 직위가 아니고 공 또한 고향에 귀환하고 싶은 염원에서 현달을 꾀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럴 경우 공이 본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그 성장한 자제를 또 서울에 머물러 두어 볼모로서 유학을 할 수 있게 만든 연후에야 가능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고려의 개국과 후삼국 통합의 초기로서 왕권과 중앙 집권화가 견고히 정착될 때까지의 일이었다.

다음은 공이 안동에서 어느곳으로도 움직임이 없이 지내면서 향직인 낭중에 안주한 경우이다. 그렇다면 벽상공신(壁上功臣)의 외아들에게 세습시킨 향직의 작위로서는 우선 소홀하고 미흡한 감이 있다. 그리고 공이 안동에서 향직에 있었다는 기록이 없고 어떤 행적도 남긴 것이 없는데 뒤에 공의 장자 책(冊)이 스스로 구하여 안동 고을의 호장(戶長)이 되었다고 나오는 것을 보면 안동 고을의 향직을 받은 것이 공의 아들 대에서부터가 아닌가 의심이 간다.

세번째의 가설은 공이 안동도 송경(松京)도 아닌 제3의 지역에 가서 신라 시대 촌주(村主)나 촌장(村長)과 같은 의미의 낭중으로서 한 고을의 원을 지낸 경우이다. 이 가설로 성립되는 것이 공이 청도(淸道)의 공암 촌주(孔巖村主)를 지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러러면 첫째로 전제되는 조건이 이곳이 그 부인 양천 허씨의 처향(妻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청도에 있는 또하나의 공암촌은 신라의 서울 경주(慶州)에서는 아주 가깝지만 천연의 높은 산줄기가 외부와 차단해 이룬 길고 큰 계곡으로서 신라의 화랑도가 수련하던 운문사(雲門寺)가 그 안에 있고 계곡을 흐르는 동창강(東倉江)이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아 옛적의 곡창으로 알려진 곳이었다. 신라의 경순왕이 백관과 회의를 열어 사직(社稷)을 고려에 바치기로 하자 마의태자(麻衣太子)는 통곡하고 거기에 따르지 않는 무리 3천을 거느리고 개골산(皆骨山)으로 들어갔다. 이럴 때에 공도 신라 왕실의 후예로서 안동에서 받는 세습의 향직에 안주하지 않고 서라벌에서 가까운 청도의 공암촌으로 들어가 종국(宗國) 신라를 복고(復古)시킬 뜻을 키웠을 수가 있다. 그렇다면 이곳의 공암이 고려 태조에게 도강(渡江)의 편의와 군량을 댄 공을 세웠을 당시 이미 90세를 넘은 양천 허씨의 시조 허선문의 선향(先鄕)이었다던가 하는 어떤 연관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가설에 대해서도 아직 이를 뒷받침할만한 확증이 나온 것이 없다. (이하 생략)

 

참고문헌: 안동권씨태사공실기(安東權氏太師公實記) p1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