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종회시중공파(侍中公派)
시중공파(侍中公派)

 인가(仁可):시중공(侍中公)


시중공 인가(仁可)의 후손 세장지. 

충남 금산군 금성면 두곡리 둑실에 있고 이는 그 8대손 사간공(司諫公) 삼(參)의 묘소이다.

호장공(戶長公) 이여(利輿)의 여섯째 아들 휘 융(融)의 아들이다. 휘 인가를 또는 인감(仁甘)이라고도 한다. 시조후 10세 대파의 아홉번째 시중공파의 파조(派祖)이다. 그 휘자(諱字)를 따서 인가파(仁可派)라고도 하였다. 

공의 부친 융(融)은 구보(舊譜)에는 없었는데 1701년에 신사보(辛巳譜)를 만들 때에 그 후손의 가첩(家牒)으로 만든 청풍보(淸風譜)에 의해 입록되었다. 그 청풍보에 의하면 공의 부친 융은 관직이 문하시중으로 나오는데 고려사 등에서는 그 사적(事跡)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공의 관직 기록은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문하시중으로 되어 있다. 전중은 전중성(殿中省)을 말하고 왕족과 족보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로서 조선조의 종부시(宗簿寺)의 전신(前身)이다. 내급사는 그곳의 6품관으로서 이조(李朝)의 주부(主簿)이다. 문하시중은 수상(首相)인데 전중내급사에서 시중은 워낙 차이가 크니 어떤 내력인지가 미상이다.

공의 독자 화평(化平)은 일명 총영(寵英)이라 하는데 그 파보(派譜)에는 은군자(隱君子)로 나온다. 혼조(昏朝)를 만나 관직을 버리고 입산(入山)하니 세상 사람이 그렇게 불렀다는 것이다. 그 혼조라는 것이 어느 시대인지 알 수 없으나 무신란(武臣亂)의 정변이 거듭되던 시기를 말함인 것 같다. 또 그 외아들인 공의 손자 협중(協中)은 호가 삼은거사(三隱居士) 또는 역락당(亦樂堂)이라고 그 파보에 나온다. 그리고 충렬왕조(忠烈王朝:1275~1308)에 누차 관직에 징소(徵召)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의 증손 시저(時著)는 제4권방( 榜)에 을과(乙科)로 올라 장사랑(將士郞)의 품계를 받았으며 호가 취성당(醉醒堂)이라고 나온다. 그런데 대동보(大同譜)에는 이러한 기록이 대부분 빠져 있다. 공의 현손(玄孫) 합경(合經)에 이르면 대동보에 그 관직이 좌우소보승 중랑장(左右小保勝中郞將)으로 나온다. 그 파보에 의하면 합경은 신묘년(辛卯年)에 장원(壯元)을 하였고 좌우소보승 중랑장에 행 예의 판서(行禮儀判書) 증 호부상서(贈戶部尙書)로 되어 있어 명료치가 않다. 신묘는 충정왕(忠定王) 3년, 1351년이라야 세대가 맞겠고 장원은 문과에서 장원 급제함일 것이다. 좌우소보승 중랑장은 무관직이고 예의 판서는 공민왕(恭愍王) 11년, 1362년 이후에 베푼 대신직이며 호부 상서는 예의 판서와 같은 대신직이되 상서는 1362년에 판서로 바꾸기 전의 명칭이니 증직과 행직이 뒤바뀐 듯하고 같은 판서직에서 판서직으로 증직되는 것도 사리에 맞지 않는다.

공의 5대손 승길(承吉) 또는 길승(吉承)에 이르면 관직이 참리(參理)·상호군(上護軍)·행 평장사(行平章事)·수문전 태학사(修文殿太學士)·검교 상장군(檢校上將軍)으로 나온다. 참리는 첨의부(僉議府)·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딸린 종2품직이고 충렬왕(忠烈王) 1년, 1275년에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과 상서성(尙書省)을 합친 참지정사(參知政事)를 고쳐 부른 이름이며 뒤에 충렬왕 34년, 1308년에는 평리(評理)로 또 고쳤다. 상호군은 정3품 무관직이고 상장군은 이것이 바뀐 이름이다. 평장사는 대개 참리·평리 등이 서로 관제에 따라 뒤바뀌던 이름이고 태학사는 대제학(大提學)이며 수문전은 임금에게 경서(經書)를 강론하던 한림원(翰林院)이다. 그 묘소가 시중공파에서는 최초로 상고되고 있는데 소재지가 경기도 김포 통진(金浦通津)의 산우산(山宇山)이라는 설이 있다. 그 길섶에서 없어진 비석의 두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1867년 경에 후손이 조사해 보니 거기에 각자(刻字)된 것이 '호군겸(護軍謙)'이라는 3자가 있고 다른 조각에는 '사권공승길지묘(使權公承吉之墓)'라 추정되는 문자가 있는가 하면 '배안동김씨(配安東金氏)'라는 문자도 판독되었다. 그 산의 국내(局內)에 3기의 대총(大塚)이 있는데 그 중 2기에는 석물(石物)이 없고 한 기에 있는 좌지(坐地)의 농대( 臺:절굿돌같이 판 좌대)가 있어 그 확(臼:구덩이)을 파내고 넘어진 비석을 세워 밑둥을 맞추니 오차가 없이 들어갔다. 그래서 지석(誌石)을 찾고자 파분(破墳)을 해 보았으나 그 위회(圍灰)가 워낙 견고하여 팔 수가 없었다. 인근 주민이 이를 '허사첨사(許沙僉使)'의 묘라고 일컫고 있는데 이것이 허사(許沙)라는 지명의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이름인지 허사가 인명인지를 알 길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판독되는 권승길(權承吉)이라는 이름이 공의 5대손 길승(吉承)과 동일인이 아닌가 추정되어 이 일대가 세거(世居) 또는 세장지(世葬地)가 아니었나 생각되고 있다. 공의 6대손 진(賑)에 이르면 문과(文科)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서 광정대부(匡靖大夫) 첨의 정승(僉議政丞)에 추증되고 7대손 흥(興)은 공조 판서(工曹判書)로서 유시(遺詩)도 있고 8대손 삼(參)은 문과 사간(司諫)으로서 대제학(大提學)에 추증되는데 이로부터 문한(文翰)과 관직이 끊이지 않으며 명문을 이루어 나간다. 대개 공의 계파는 일찍부터 안동에서 떠나 서울 지역으로 진출하였던 것으로 보이고 현달하는 것은 타파에 앞섰으나 후손이 그리 많이 번창한 편은 아니다.

(이하 생략)

   

참고문헌:태사공실기 

1,346쪽에서 발췌